우리는 호세아서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호세아서는 처음에는 익숙한 이야기들의 전개인지라 가벼운 마음으로 묵상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습니다.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와 타락이 분리될 수 없음을 점점 더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 정도는 아니지 라는 교만한 생각들이 무너집니다. 성도들과 전체 카톡방에 <오늘의 묵상 포인트>를 몇가지 정리해서 공유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고사성어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미6:6-8]에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미가 선지자의 외침도 함께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여기서도 그분 앞에서 행하여야할 것들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정의와 인자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죄악 투성이인 나를 정의와 인자로 채우시고 내 존재를 인정해 주시는 복음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존재를 아십니다. 내가 아무리 선하고 믿음이 가득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이루어 내려 하고 이루어 내어도, 나는 그것으로 인정받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믿음으로, 믿음 안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 그 자체가 우상이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로 나의 존재 자체를 완성하십니다.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나의 존재가 하나님 때문에 존귀해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존재함으로 섬기고 사랑하면 그만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하려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아무리 선한 동기이고, 믿음 안에서 꿈꾸는 이상일지라도 자칫 혼돈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 교회를 교회 답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여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교회됨을 이루는 것에서 물러서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부름 받은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으로 가득채워짐으로, 우리는 진정한 교회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