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한편의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글이라는 것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내면에서 숙성되고 처리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섬기고 있는 신학교에서도 사역하시는 교수님들에게 칼럼을 요청합니다. 지난 주간에 마감일자가 다가오는데 담당 간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혹시 시간이 더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라는 짧은 이메일 이었습니다. 글쓰기의 고통을 어떻게 아시고 적절한 타이밍에 단비와 같은 이메일이 도착한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답을 했을까요? “네, 간사님, 글이 아직 제 머릿속을 멤돌고 있습니다. 연장해 주시면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는 것이 되겠습니다.”
 토요일, 교회 사무실에 앉았습니다. 주보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정기적으로 채워지는 공간을 얼른 마무리하고, 칼럼을 대면합니다. 저의 내면을 대하기도 하고,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성도님들을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 제가 긴급한 상황에서 갑자기 설교를 해야 할 때 종종하는 설교가 떠올랐습니다. “행복자”라는, 하버드 대학 어느 총장님의 연설내용이 모티브가 되는 나눔입니다.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연구를 하신 결과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있는 사람, 두 번째는 그 입술에 노래가 있는 사람, 세 번째는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재해석되는 내용으로 제가 설교를 나눕니다. 우리는 한들 수 있는 복음의 깃발이 있습니다. 성도인 우리들에게는 늘 경배와 찬양, 하나님의 성품을 끊임 없이 선포하고 높이며(경배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한 노래(찬양)로 가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이끌어 주고, 밀어주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는 동역자들이 있으니 행복자의 필요충분 조건이 충분한 것이 성도의 삶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가까이 있는 행복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몇몇 이유로 내 마음에 빗장이 잠겨져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 자신을 향하여, 나의 사명에 관하여, 나의 이웃에 관하여 마음이 닫혀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자로 불러 주신 하나님 앞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그리고 주변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이 차려 놓으신 행복의 잔치상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행복자’입니다. 샘물 가족, 우리 모두를 행복의 자리로 초대해 주신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행복을 함께 누리실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