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 처음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사랑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도덕 시험을 칠 때, ‘사랑’이 정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그 사랑이 참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 편에서 사랑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입은 자, 성도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삶으로 흘러 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 가운데 빠져 살아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주님이 행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에 미치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셨고, 행하셨고, 명령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저는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출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만 구원 받는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니라, ‘나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나님 사랑을 받은 자’ 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가 사랑에 너무 치우치고, 복음의 메시지를 단순화시키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 라는 명제가 핵심이 되면서, 구원의 교리와 은혜가 극단적으로 개인주의화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랑의 기독교 공동체가 개인주의화 된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의 현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와 비판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와 감격이 자기 의(義), 자기 공로 의식으로 변질되면서 묘한 율법주의가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나’에 대한 바른 의식, 다른 사람에 대한 바른 관점을 잊지 않도록 주신 주님의 비유를 저는 제 마음 중심에 두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은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 비유에서 그는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채무를 갚으라고 독촉을 합니다. 그는 일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랑을 적용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높은 기준으로 사랑이 아닌 율법을 적용하는 것은 건강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샘물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풍성한 문명을 누리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정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