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일 설교요약] 마18;21~35 십자가길에서 만나는 용서

마16장에서 20장까지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는데 그 시작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마20 장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소개되는 비유나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는 길 위에 놓여진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앞에는 참된교회의 표지중에 하나인 권징(discipline)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그 영혼을 바르게 하기 위해 도와주는 권징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권징은 사랑이 근거가 되어야 하고 그 사랑은 겸손과 온유함으로 드러나야 성경적 권면이 가능해집니다. 그러지 않고 성경적 원리를 벗어나게 되면 내 편의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입게 됩니다. 이런 권징에 대한 말씀을 하자 베드로가 가진 의문은 권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죄를 반복할 경우 얼마까지 권면을 해야하는지 의문이 들었고, 7번까지 하면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라도  해라’고 하셨습니다. 이말씀은 78번째나, 491번째는 용서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용서는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35). 그러면서 일만달란트를 탕감받는 이야기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만달란트는 노동자가 20만년을 쉬지않고 벌어야 하는엄청난 액수인데 이는 실제로 이런일이 일어날 수없는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빚은 문맥적으로 볼 때 죄를 말합니다. 이 일만달란트는 즉 왕에게 지은 죄, 하나님께 지은 죄를 상징하고 있으며 그 죄는 우리가 갚을 수 없다는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빚을 탕감받게 되는데 탕감받는 조건은 오직 주님의 불쌍히 여김입니다(27). 탕감받는 일에 있어서 종이 한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탕감받은 종이 나가서 백 데나리온을 빚진자를 찾아가서 자기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종이 자기의 돈을 돌려달라는 요구는 정당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백 데나리온을 빚진자를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심각한 죄로 여기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나의 정당함을 주장하다가 상대방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죄를 범할때가 많습니다. 수근수근하는것도 살인과 똑같은 죄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롬1:28~32).

죄의 문제는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감당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알 때, 내가 정당하게 받을 수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은혜를 알때 이 문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모든것을 해결하신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비로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다운 용서가 일어나는 시작점이 됩니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우리를 살리는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을알아서 이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어 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