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일 설교요약] 창17장 15~19 하나님의 웃음

창17장의 구조를 보면, 앞뒤로 할례의 명령과 할례를 시행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그 중간에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는 것과 이삭을 낳게 된다는 언약을 세우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이런 구조는 할례가 어떤 의미인지를 이름을 바꾸는 일과 이삭의 대한 이야기롤 설명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할례를 통해 알려줍니다. 다시말해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 죽은자와 같은데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실것이라는 것이 할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웃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 낳게 되는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지어 줍니다. 이삭은 ‘그가 웃는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웃음은 자신의 한계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했던 아브라함의  웃음과는  대조되는  죽은것에서  살려내시는  전능자의 웃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할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롬4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롬4 장의 아브라함에 대한 진술은 창17장의 아브라함과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해 웃었던 아브라함을 롬4장에서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고 하나님이 이루실것을 확신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분명 그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과 신약의 아브라함 사이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창17장의 사건은 할례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로 죽었던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죽은 자의 몸에서 이삭을 얻게 되니까 하나님이 웃으신 것입니다. 없는 것에서 있게 만드시는 전능자의 웃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아브라함은 이제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할례는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겨주십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대신하여 주님이 죽으심으로 주님의 의가 우리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래서 롬1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 구십세에 무너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을 믿음으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며 부활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지금도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속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나는 백세입니다. 사라는 구십입니다’에 머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너의 고집, 욕심, 교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번민속에 허우적 거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인생을 향해서 ‘너의 인생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보석이며, 너의 존재자체가 고귀하다’고 예수안에 있는 우리인생을 보고 계시면 웃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