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일 설교요약] 창16:1~6 은혜와 행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는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여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는데 자녀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나이가 들어서 여인으로서는 도무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지경까지 끌고 가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증명하시려는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녀를 준다는 것은 아브람에게도 사래에게도 아무런 조건이 없을 때, 자녀를 얻을 아무런 실력이나 근거가 없을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래와 하갈을 통해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은혜와 대조되는 행위는 내가 행한 것이 내 자랑이나 공로가 되어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을 근거로 하나님께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면 그 믿음도 행위가 됩니다. 이 행위를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여종(하갈) / 자유자(사라), 이스마엘 / 이삭, 육체 / 약속, 종노릇 / 자유, 땅의 예루살렘 / 하늘의 예루살렘, 멸시함 / 멸시받음.
하갈은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자기 힘과 자랑이 되었고 그것으로 아브람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한것을 율법의 종노릇 한 것이라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주인이 되면 그것은 하갈이 되는 것이고 반드시 사래를 멸시하게 됩니다. 반대로 자유자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자는 지금까지 내가 율법에 매여 종노릇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잘하려고 하고, 실수 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래서 더 열심히, 치열하게 살려는 것들이 모두 율법의 종노릇한 것이었고, 그래서 남을 정죄하고 멸시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저와 여러분은 율법의 종이 아니라 율법의 주인이 되시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된 자녀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가 다시 율법에 매여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은혜에 묵여 있는 자유자임을 잊지 맙시다.
은혜에 묶여 있다는 감격에 울면서도 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할 자들입니다. 이 과정중에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아버지의 풍성한 것을 채워주시며, 넘어지고 자빠지는 인생을 위해 탄식하시며, 내가 울고 있을 때 나와 함께 울어주시고, 내가 하나님앞에 아무것도 내어 놓을 것이 없을때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길은 눈물없이 갈 수 없는 은혜의 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 무엇으로도 그 은혜를 끊을 수 없기에 웃으며 가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믿고 은혜로 이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