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부활의 연결고리, 고난과 죽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연세계는 죽음에 대해 모든 생명체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가르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창조가
부활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 죽음이 있다? 왜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것을, 절망이라는 것을, 실패라는 것을 허락하시면서 그분의 창조와 구원역사를
끌어오시는 것일까요? 우리 생각에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다 없애 버리고 말 잘 듣는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 다시 시작하시면 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죄, 우리가 부린 고집과 불순종을 어떤 의미에서는 그대로 인정한 채, 예수님으로 죽음을 돌파하게 하심으로써 부활과 영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죽어서 천국가는 것, 종말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녹록치 않는 현실속에서 후회하고 애통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죽음의 권세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부활을 꽃피운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진리는 꼭 기억해야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영생을 만드는 과정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지내온 인간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셔도 마땅합니다.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오히려 핀잔과 오해받고, 욕먹고 제자들에게는 부인과 배신을 당하셨고 결국 십자가에 죽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을 힘으로 억압하신 것이 아니라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들의
저항과 반발과 무지를 위에 꽃을 피우시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고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우리는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와 실패를 다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범죄와 실패의 자리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바닥에 못자국이 남는 것들이 필요한 과정이라고 그의 삶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한 날은 의미가 있고, 잘못한 날은 손해’ 라고 인생을 간단하고 쉽게 왜곡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잘못한 것도 사용하시고 그런것들로도 얼마든지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지지고 볶고, 미칠 것 같고, 말이
안 되고’가 주안에서 빛을 발하고, 선을 이루고, 영광이
되고, 생명의 부요함과 아름다움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역설이 곧 복음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나중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예수 안에서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밤낮 후회하고 한탄하는 것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갈등, 고민, 절망, 자괴감, 후회, 한숨 등이 진짜 보석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서 부활의 인생을 살고, 부활의
씨앗을 심고 죽음의 자리를 지켜 내는 그 믿음의 소망과 담대함과 인내와 자랑을 가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