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라는 것은 단지 부족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당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사람은 울게 됩니다.
울음은 패배자 혹은 연약한 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있다는 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선 어떤 존재됨을 경험할 때 우리는 경이를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지는 의문은 구원의 선물을 주시는 방식이 왜 십자가여야만 하는가 였습니다. 다른 멋지고 보기에 좋은 방법이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리고는 '나 구원받았네 할렐루야!'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사가 불통인 현실을 만나게 되면서 예수 믿는 것에 자괴감을 가지게 됩니다.
목숨걸고 믿음을 지켰지만 그것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없고, 예수 모르는 자들은 더 잘사는 것 같아 화가 납니다. 욥의 고난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가 가진 이해의 틀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만날 때마다 '이게 뭐지'하는 좌절과 원망과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욥기서가 42장이라는 긴 분량을 활애해서 욥의 넋두리를 담고 있는 이유를 깊이 묵상하면서 이 넋두리를 통해 반전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경이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은혜이지요~

그늘이 있다는 것은 햇볕이 다만 밝고 뜨거운 열기로 그 존재를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짙푸른 녹음(초록 녹에 그늘 음)은 햇볕의 차단이 아니라 무성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의 그늘을 보면 반짝이는 햇살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그늘은 큰 그늘을 만들만큼 큰 나무를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해는 자신의 광명함을 넘어서 짙푸른 녹음을 만들어 그늘의 깊음을 가지는 데서 그 영광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아 만들어진 인간의 영광과 자랑은 늘 옳고 늘 밝고 늘 확실한 분명함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더 깊이 고뇌하게 하시며 눌러 생각하게 하시며 신음하게 하시어 자신의 한계 밖으로 떠밀리는 위기와 고난과 참을 수 없어 지르는 비명 속에서 더욱 밝히 드러납니다. 그 속에서 녹음이 우거지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와 넓이가 더해지게 하십니다. 인생의 한계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채우시는 부요함을 누리는 교회이길 소원해 봅니다.

하나님의 부요함이 그늘을 통해 주어지는 이유는 벅차니까, 감당할 수 없어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대강 하시거나 타협하지 않으시기에 고통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이 만들 수 없는 교회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이 문제를 푸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목적하신 창조와 구원의 궁극적인 내용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이 크신 사랑에 붙잡힌 감격이 삶을 통해 증명되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간구합니다.